세바다 활동/성명 및 논평

[2021.10.29] <어둠의 속도> 재출간에 부쳐

[공동 논평] <어둠의 속도> 재출간에 부쳐

- ‘자폐증’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중지하라

 

  2021년 10월 27일, 자폐를 소재로 한 SF(공상과학) 소설 <어둠의 속도>가 12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자폐 특성을 과연 치료해야 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자폐를 비롯한 장애는 과연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 김초엽 작가는 “기술의 발전은 질병과 장애를 가진 이들을 구원할까?”라고 덧붙였다. 또한 이 책은 세계적인 SF문학상인 네뷸러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극찬을 받았다. 자폐 특성을 지닌 당사자들 스스로도 모든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할 만큼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인정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의 재출간을 환영하며, 동시에 자폐당사자와 신경다양인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그런데 문제적 작품인 이 소설의 재출간 과정은 자폐인들에게 아쉬움을 남긴다. 재출간 과정에서 ‘자폐증’이라는 단어를 수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이 처음 번역 출간될 당시에는 ‘자폐증’이라는 용어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재출간이 되는 시점인 지금은 지양해야 할 단어가 되었다. 이 단어는 자폐성 장애를 치료해야만 하는 질병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크게 다르다. 국제적 진단기준인 DSM-5와 ICD-11가 ‘아스퍼거 증후군’을 없애고 모든 자폐 특성을 자폐성장애로 통합한지 오래되었고, 당사자들은 자신을 People with autism spectrum이 아닌 Autistic people로 부르고 있다. 이미 자폐연구자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당사자들이 자폐정체성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자폐증이라는 차별표현이 대한민국에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21년 시행된 KCD-8과 한국의사협회의 의학용어집이 ICD-11가 2022년 시행됨에도 불구하고 Autism Spectrum의 번역어를 ‘자폐증’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한국어 어중이 해당 용어가 규범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편집부는 원서에서 사용된 autism이라는 단어가 ‘자폐’, ‘자폐성 장애’, ‘자폐증’ 모두에 대응되기 때문에 번역어를 수정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자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것은 자폐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유감이다. 결국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자체가 ‘자폐증’이라는 용어의 사용으로 인해 희석되는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자폐특성은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도, 치료할 필요도 없으며 자폐인들은 자신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이것이 자폐권리운동(ARM)과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 운동의 주된 정신이다. 이들 운동으로 인해 자폐성 장애와 그 당사자에 대한 인식이 세계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나 한국 사회는 이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언론 등에서 아직까지도 이 단어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자폐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이에 우리는 <어둠의 속도> 다음 쇄에 이 차별용어가 반드시 수정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이다. 

 

  자폐에 대한 통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는 <어둠의 속도>의 재출간을 다시 한 번 환영한다. 다음 쇄에는 잘못된 단어가 수정되어 당사자들이 좋은 작품을 마음 편히 읽고 권할 수 있길 기원한다.

 

2021년 10월 29일

성인자폐(성)자조모임 estas, 신경다양성 지지모임 세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