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바다 단체준비위원회 대표 리얼리즘
오늘 세바다 SNS로 항의의 메시지를 전달한 이가 있다. 그는 신경다양성이 ‘신경발달적인 다양성을 가진 이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지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의 정신질환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단체가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며 정신질환을 신경다양성의 범주로 인정하는 세바다의 입장을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 견해에 대해서 세바다를 대표하여 논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이 견해를 피력한 자가 정신질환을 비하할 의도로 항의 댓글을 쓴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정신질환자에게든 신경다양인에게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주장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신경다양성에는 자폐, ADHD, 난독증으로 대표되는 ‘명백한 신경다양성’이 있다. 이들이 신경다양성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며 거의 모든 신경다양성 활동가들이 이들을 신경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우울증, 조울증,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은 정신장애로 분류되며 이들의 신경다양성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위와 같은 견해를 피력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언뜻 보면 이해가 간다. 자타에 명백한 피해를 주는 정신질환을 다양성의 범주에 넣기 주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신경다양성과 정신질환은 칼로 무를 자르듯 단번에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관계가 아니다. ADHD인이 기분장애 증상을 겪기도 하며, 심한 자폐인 중 일부는 조현병 치료에서 사용되는 리스페리돈을 처방받아 먹기도 한다(그것이 옳은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ADHD 증상 중 일부는 기분장애 등에서 나타나는 주의력 결핍 및 난독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또한 조현병 스펙트럼과 성격장애에 동시에 분류된 조현형 성격장애는 자폐에서도 나타나는 ‘사회성 및 대인관계 결핍’이 진단기준에 있으며 조현형 성격장애와 자폐를 오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명백한 신경다양성’에서 ‘정신질환’을 완벽히 분리하거나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피해 유무의 기준으로 봐도 ‘명백한 신경다양성’과 정신질환을 구분할 수는 없다. 경한 자폐나 과잉행동이 없는 ADHD의 경우에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적다. 그러나 심한 자폐나 충동 억제가 되지 않는 ADHD의 경우에는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반대로 정신질환자라고 해서 남에게 피해만 끼치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치료가 잘 되어가고 있는 정신질환자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다. 정신질환은 ‘명백한 신경다양성’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당사자 자신의 고통은 정신질환이든 ‘명백한 신경다양성’이든 자신의 특성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데에서 온다. 정신질환에서도 ‘명백한 신경다양성’처럼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고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예후에 좋다.
정신질환은 신경다양성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어떤가? 정신질환자의 삶의 질을 위해서 치료가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질환 당사자의 삶에 있어서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수년간의 정신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완치하지 못하고 계속 약을 먹거나 정신장애인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상태에서 치료만을 주장하는 것은 정신질환 당사자에게 불가능한 목표를 강요함으로써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 만성 정신질환 당사자에게 정신질환의 완전한 박멸을 바라는 것은 기존 장애 담론의 주류 논의에도 역행하는 것이며 이들에게는 강압적 치료보다는 정신적 지지와 실질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정신질환은 발달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은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10대 사이에서 우울증 환자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으며, 10대 사망원인 1위를 오랜 기간 차지한 게 바로 자살이다. 비록 정신질환이 발달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더라도 청소년들이 정신질환으로 인해 학업과 대인관계에서 실패하고 자살한다면 이도 넓게 보면 발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질환은 긍정적인 면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우울증을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과 성찰의 기회로 삼고 더욱 성장한다. 조현병 환자들의 높은 창의성은 예술 활동에서 성과를 보이며, 실제로 ‘안티카’라는 단체는 정신장애인의 특성을 이용하여 예술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조울증의 조증 상태에서 높은 생산성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이제 앞서 내린 결론으로 돌아가보자. 정신질환을 신경다양성에서 배제하려는 견해가 왜 정신장애인에게도 신경다양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지를 생각해보자. 정신질환과 신경다양성을 깔끔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앞에서 얘기했다. 그렇다면 ‘명백한 신경다양성’ 당사자가 정신질환에 동반 이환되었다고 해서 그를 신경다양성의 바운더리에서 쫓아내거나, 그가 겪는 분명한 정신적 문제를 신경다양성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명백한 신경다양성’과 만성 정신질환에 동반 이환된 사람들에게 한쪽만을 신경다양성이라고 하고 한쪽은 다양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악영향을 준다. 자신의 어떤 특성은 긍정해도 되는데, 어떤 특성은 부정해야만 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부조화로 인한 커다란 고통을 줄 뿐이다. 정신장애인은 정신질환을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분위기 속에서 위축되고 좌절한다. 정신장애를 숨기라는 압박을 항시 받으면서 생활하며, 무의미한 과잉 치료로 인해 약 부작용과 자유 박탈을 겪는다. 정신장애를 다양성의 관점에서 배제하는 것은 정신장애인을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필자가 세바다 톡방 부방장과 세바다 단체준비위원회 대표로 있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세바다의 정신질환 당사자 회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경다양성 개념을 알게 됨으로써 많은 위안을 얻었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신경다양성으로 인해 필자의 질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스펙트럼 중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정신장애를 박멸해야 한다는 낡은 치료주의적 관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경다양성의 범위를 함부로 정의해도 된다는 알량한 오만을 뽐내기 위해서 정신장애를 신경다양성의 범주에서 배제시키지 말라. 매드 프라이드와 신경다양성은 궁지에 몰린 정신질환/정신장애 당사자들과 정신 및 발달장애 중복 당사자의 마지막 보루이다.